
하스스톤 프로게이머 ‘크라니쉬(Kranich)’로 국제 대회에서 활약해 온 백학준 님은 플레이어를 넘어 기획자의 자리에서 CCG 장르의 구조와 전략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오랜 경기 경험을 바탕으로 카드의 역할과 게임 흐름, 플레이어가 마주할 변수를 세밀하게 해석하며 프로젝트의 기획을 완성하고 있죠. 개인 방송과 유튜브로 다양한 유저들과 소통해 온 경험도 기획자로서의 중요한 자산입니다. 어느 순간에 재미가 발생하고, 어떤 지점에서 이탈하거나 좌절하는지 플레이어의 실제 감정 곡선을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죠.
백학준 님은 카드 하나가 게임 전체에 어떤 파급을 만드는지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며 규칙을 다듬고 여러 직군과 협업해 기획 의도를 구조적으로 구현해 냅니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CCG 콘텐츠 기획이 단순한 카드 제작을 넘어 플레이 경험 전체를 창작의 일임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프로게이머에서 기획자로의 커리어 체인지"

Q. CCG 장르의 유명한 프로게이머였죠. 엔씨에서 만나 뵙게 되어서 더 반가운데요. 게임 기획 분야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하스스톤 프로게이머로 거의 10년을 활동했고, 그 이후에는 개인 방송과 유튜브를 하면서 콘텐츠 크리에이터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당시 조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게임도 예전만큼 흥행이 잘 안되는 것 같고, 계속 제자리걸음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제가 왜 그런지 스스로 정리해 보고 싶어서, CCG 장르가 왜 예전 같지 않고 침체됐는지 10페이지 내외의 PPT를 만들어서 유튜브 방송에서 프레젠테이션을했어요.
현재 제가 속한 개발팀의 PD님이 그 방송을 보시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업무적으로도 이런 분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기획자로도 가능성이 있겠다”고 판단하시고 “기획자로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 메일을 주셨어요.
Q 메일을 받았을 당시 어땠나요?
처음엔 솔직히 스팸 메일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엔씨에서 갑자기 연락이 오는 게 비현실적이었달까요. 회신을 하지 않고 며칠이 지났는데 HR에서 “지원 의사가 없으면 답이라도 해달라”고 하셔서 ‘진짜구나’ 싶었어요. 한 주 정도 고민하다가 ‘이건 진짜 좋은 기회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도전하게 됐습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엔씨를 꿈의 회사로 꼽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무엇보다 제가 잘 아는 CCG 장르로 기획자 일을 시작할 수 있다니 정말 행운이라 생각했어요. 실제 입사해 보니 무엇이든 배우기에 좋은 환경이 갖춰졌어요. 인프라도 그렇고, 선배 기획자분들도 옆에서 큰 도움을 주시죠.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는 환경이에요.
Q 플레이어로서의 경험이 기획 업무에 도움이 되나요?
장단점이 있는 듯합니다. 먼저 제가 10년 가까이 CCG를 플레이하며 쌓은 경험은 지금 기획할 때 정말 큰 자산이에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수가 나오는지, 카드 하나가 어떤 변수로 이어지는지 자연스럽게 떠오르니까요. 또 프로게이머 이후 인플루언서 활동을 하면서 거의 1만 명 가까운 사람들과 소통해 본 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정말 잘하는 유저부터 막 입문한 유저까지, 각 수준마다 무엇을 어렵게 느끼고 어떤 포인트에서 재미를 느끼는지 직접 들을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기획할 때 ‘유저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훨씬 입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요.
다만 플레이어 경험이 길다 보니 ‘저에게는 당연한 것’이 초심자에겐 전혀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의식적으로 제 시각을 바꾸어 생각하려 노력합니다.
Q 플레이어와 기획자 중 어떤 역할이 더 잘 맞는 것 같나요?
기획자가 훨씬 잘 맞는 것 같아요. 플레이어일 때는 주어진 규칙 안에서 최선을 찾는 게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그 규칙을 제가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큰 매력입니다. 무엇보다 기획자로서의 자유도가 좋아요. 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직접 제안하고, 그걸 게임 안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만큼 책임도 커졌지만, 제 생각을 그대로 시스템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플레이어 시절에는 느끼지 못한 재미예요.
"수많은 가능성 속 아이디어를 게임에 구현하는 일"


Q 막상 기획자로 일해보니 어떠세요?
할 일이 상상 이상으로 많아요. 게임을 만드는 건 ‘0부터 쌓아 올리는 일’이라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규칙 하나, 카드 하나에도 확인해야 하는 요소가 너무 많죠.
또한 저는 10년 가까이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처음엔 조직 안에서 루틴을 맞추는 게 확실히 어색했어요. 매일 정해진 일정과 회의 리듬이 있다 보니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죠. 그런데 막상 여러 직군과 협업하며 일하는 과정을 겪다 보니까, 그게 오히려 제 성향과 잘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혼자 일할 땐 못 느꼈던 재미도 있고요.
Q 구체적으로 CCG 콘텐츠 기획 직무는 어떤 일을 하나요?
게임의 기본 규칙과 시스템을 설계하는 동시에, 어떤 카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일지, 유저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실수도 할 수 있는지, 수싸움의 폭이 얼마나 열려야 재미가 생기는지 등을 설계해요. 그냥 카드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카드가 존재함으로써 게임이 어떤 구조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거죠.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플레이에 어떻게 드러날지도 테스트하고 수정하는 프로세스를 반복해야 하고요.
재미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설계하는 일이기도 해요. “어떻게 하면 다양한 수가 새로 만들어질까?”를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유저가 어떤 카드를 낼지, 그 카드가 또 다른 변수를 어떻게 만들지처럼 혼자 장기 두듯이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그려보죠.
Q 하루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매일매일 다르긴 한데 회의가 많은 편이에요. 기획자는 설득하는 일이 많아서 말을 많이 하게 돼요. 프론트, 서버, 아트, 애니메이션 등 여러 직군의 시각을 들으면서 제가 놓치는 부분을 보완하기도 하고, 기획 의도를 계속 설명하면서 맞춰가기도 해요. 기획을 혼자만의 생각으로 밀고 갈 수 있는 직무가 아니라는 걸 계속 느끼고 있어요.
"차가운 두뇌와 따뜻한 심장의 기획자"


Q. 좋은 기획자의 태도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먼저 고민이 많아야 한다는 거예요. 카드 하나, 시스템 하나에도 영향을 주는 요소가 많다 보니까, 디테일을 어느 정도까지 챙기느냐가 완성도를 좌우하거든요. ‘이 정도면 됐겠지’가 통하지 않는 장르에요.
두 번째는 협업이에요. 나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가진 고민을 모두의 고민으로 공론화해서 함께 해결해야 해요. 예전엔 몰랐는데 회사에 와서 이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크게 느꼈어요. 결국 기획자는 혼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팀 전체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Q. 기획자로서 요즘 고민거리가 있을까요?
앞선 답변의 연장선인 듯해요. 기획자로서도, 회사원으로서도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조직을 드라이브하는 능력이 요즘 고민이에요. 저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정리하는 건 자신 있는데, ‘그걸 왜 해야 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필요한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팀이 움직이는지’ 이런 부분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업무를 할수록 드라이브를 걸어 일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니까 하자’로는 절대 안 되고, 의견을 조율하면서 추진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걸 요즘 많이 느끼고 있어요. 아직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그런 능력이 좋은 시니어 분들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Q 게임을 기획하며 실험해 보고 싶은 세계관이나 메카닉이 있나요?
좀 엉뚱할 수 있는데, ‘기도할수록 운이 좋아지는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예전에 대회에서 기도하는 걸로 유명한 분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만약 기도하면 진짜 운이 좋아지는 게임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가 봐도 우연이지만, 초심자가 한 번쯤 기도해서 이겨보는 재미도 게임에 입문하는데 중요한 요소죠. 보통 기획자들은 ‘운’ 요소를 최소화하려고 하는데, 저는 그 ‘우연의 재미’를 어떻게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Q CCG 콘텐츠 기획자와 잘 맞는 성향이 있을까요?
저는 ‘차가운 두뇌와 따뜻한 심장’이라고 생각해요. 카드 게임을 좋아하는 분들은 보통 두뇌도 차갑고 심장도 차갑거든요. 그러면 초심자가 상처받아요. 실력 차가 있는 장르다 보니 접근성이 떨어지고, 사람이 게임에 적응하기 전에 멘탈부터 무너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CCG 장르의 기획자는 두뇌는 냉정하게 굴리면서도, 사람을 향한 감성이나 따뜻함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Q 게임 기획자를 꿈꾸는 분들에게 조언을 덧붙인다면요?
게임을 많이 해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를 끝까지 고민하는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획자를 꿈꾸는 분들은 대체로 게임을 좋아하고 플레이 경험도 많은데, 준비 과정에서는 단순히 플레이 시간을 늘리는 것보다 게임의 구조를 보려는 태도, 즉 기획자의 시선으로 한 번 더 바라보는 연습이 큰 도움이 돼요.
게이머들끼리 자연스럽게 나누는 토론도 중요하고요. “이 시스템은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밸런스가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던지며 의견을 나누다 보면 단순한 감상에서 벗어나, 게임을 만드는 관점의 사고 방식이 쌓이거든요.
또 게임을 잘한다고 해서 항상 유리한 건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 너무 익숙했던 요소들이 초심자에게는 오히려 장벽이 된다는 걸 기획하면서 깨달았어요. 그래서 보편적인 시각, 초심자의 경험,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지점을 의식적으로 살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유저들이 어떤 순간에 재미를 느끼고, 어떤 부분에서 불편함을 겪는지를 살펴보세요. 그 감정의 흐름을 이해하는 과정이 기획자의 시야를 넓혀주니까요. 그렇게 모인 경험과 데이터들이 결국 게임을 설계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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